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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체 (집단지성, 좀비진화, 코로나공포)

by cash-maker 2026. 6. 14.

 

좀비가 학습을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단순히 달려드는 것을 넘어, 한 개체가 깨달은 것을 나머지 전체가 실시간으로 공유한다면요. 연상호 감독의 신작 《군체》를 보면서 저는 그 질문 앞에서 제 코로나19 시절 기억이 불쑥 올라오는 걸 느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퍼진다는 공포, 그리고 그 공포가 사람 사이를 어떻게 갈라놓는지를 저는 이미 3년 넘게 직접 겪어봤으니까요.

 

집단지성으로 진화하는 좀비, 그 과학적 근거

 

《군체》가 다른 좀비 영화와 결정적으로 다른 지점은 감염체의 행동 원리를 실제 과학에서 가져왔다는 점입니다. 영화 속 핵심 설정의 모델이 되는 것은 황색망사점균(Physarum polycephalum)입니다. 황색망사점균이란 뇌도 신경도 없이 단세포 수준에서 집합체를 이루는 균류로, 개별 판단 기관이 없음에도 최적의 경로를 스스로 찾아내는 생물입니다.

 

이 생물의 능력은 단순한 흥미로운 사례가 아닙니다. 나카가키 토시유키 연구팀은 2000년 미로 실험을 통해 황색망사점균이 미로의 최단 경로만을 스스로 선별해내는 것을 실험으로 증명했습니다. 먹이가 놓인 곳까지 몸 전체로 뻗어나가되, 영양분이 많이 흐르는 통로는 굵어지고 쓸모없는 경로는 저절로 사라지는 방식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화에서 말하는 집단지성(Swarm Intelligence)의 핵심입니다. 집단지성이란 개별 개체는 단순하더라도 연결되는 순간 전체가 하나의 지적 시스템처럼 작동하는 현상을 말합니다.

 

영화 속 감염자들은 이 원리를 그대로 구현합니다. 흰색 균사체를 통해 서로의 시각 정보와 청각 정보를 공유하고, 한 개체가 "간판은 사람이 아니다"라는 것을 학습하면 그 정보가 즉시 전체로 퍼집니다. 처음에는 빛만 봐도 달려들던 저사양 좀비가, 패치 이후 이족보행은 물론 사람과 사진까지 구별하는 고사양 버전으로 업그레이드되는 장면은 그래서 섬뜩하게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직접 겪어보니 이 설정이 단순한 SF 상상이 아니라는 게 더 무겁게 느껴졌습니다. 코로나19 바이러스가 델타, 오미크론으로 변이를 거듭하면서 전파력이 강화되는 것을 실시간으로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바이러스의 변이와 영화 속 집단지성은 메커니즘이 전혀 다르지만, "위협이 적응하고 진화한다"는 감각은 제가 이미 몸으로 알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군체》의 집단지성 설정에서 진짜 공포는 리더가 없다는 점입니다. 중앙에서 명령을 내리는 개체가 없으니, 몇 마리를 제거해도 전체의 진화는 멈추지 않습니다. 생물학에서는 이를 분산 처리(Distributed Processing)라고 부르는데, 분산 처리란 중앙 제어 없이 각 개체가 독립적으로 정보를 처리하면서도 전체가 하나처럼 움직이는 구조를 의미합니다. 이 구조가 무너지지 않는 이유는 개별 개체가 아니라 그들을 연결하는 패턴 자체가 시스템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군체 속 좀비들이 보여주는 주요 진화 단계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1단계: 빛과 소리에 반사적으로 반응하는 무지성 질주 상태
  • 2단계: 사족보행에서 이족보행으로 전환, 균사체를 통한 정보 공유 시작
  • 3단계: 사람과 사진 속 인물을 구별하는 시각적 식별 능력 획득
  • 4단계: 개별 행동이 아닌 조직적 군체 행동으로 전환

 

코로나가 소환한 기억, 공포보다 무거운 불신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극장에 들어가기 전에는 좀비 액션 영화로 가볍게 즐길 생각이었는데, 스크린을 보는 내내 2020년부터 2022년까지의 기억이 계속 겹쳐 보였습니다. 마스크를 쓰지 않으면 불안했던 지하철, 누군가 기침 한 번에 사방에서 눈길이 쏠리던 식당 안, 그리고 "저 사람이 혹시 감염자일까"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던 순간들이요.

 

《군체》의 생존자들이 서로를 의심하는 장면에서 저는 그때의 사회 분위기를 정확히 다시 느꼈습니다. 코로나19 유행 초기, 한국의 집단 감염 사례가 특정 집단과 연결되자 해당 집단 전체를 향한 혐오와 배제가 빠르게 확산된 적이 있었습니다. 바이러스 자체보다 바이러스에 대한 공포가 만들어낸 불신이 훨씬 넓은 피해를 냈죠. 제가 직접 겪은 그 분위기와 영화 속 밀폐된 빌딩 안에서 서로를 경계하는 생존자들의 모습은 놀랄 만큼 닮아 있었습니다.

 

실제로 세계보건기구(WHO)는 코로나19 팬데믹 당시 "인포데믹(Infodemic)"이라는 개념을 제시했습니다. 인포데믹이란 감염병 유행과 함께 잘못된 정보가 과잉 확산되어 사회적 공황과 불신을 가중시키는 현상을 말합니다. WHO는 바이러스 자체만큼이나 인포데믹 대응도 공중보건의 핵심 과제라고 강조한 바 있습니다(출처: WHO).

 

영화 속 권세정이 다리가 불편한 현이를 망설임 없이 도와주는 장면은, 개인적으로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 깊은 순간이었습니다. 세정이나 현이 모두 살아남기에 최적화된 성격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 비효율적인 선택이 결국 더 많은 사람을 살리는 방향으로 작동합니다.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릅니다, 코로나 시절 미담들이 그렇게 움직였으니까요. 마스크가 부족하던 초기에 이웃에게 마스크를 나눠주던 사람들, 배달이 끊긴 독거노인에게 식료품을 챙겨주던 자원봉사자들. 위기 속에서 인간은 이기심만큼이나 연대감으로도 움직입니다.

 

다만 영화가 이 연대의 서사보다 공포와 대립의 긴장감에 훨씬 더 집중한 점은 아쉬운 부분이기도 합니다. 앤트밀(Ant mill) 현상, 즉 선두 개미가 자신의 페로몬 흔적과 만나 무한 루프에 빠져 결국 죽을 때까지 도는 개미 군체의 집단 오류처럼, 방향을 잃은 연결이 얼마나 치명적인지를 영화는 날카롭게 짚습니다. 알고리즘과 AI가 연결을 최적화하지만 정작 어디로 향하는지 아무도 묻지 않는 지금의 사회에 대한 메타포로 읽혔습니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이 발표한 2024년 장르 영화 트렌드 보고서에서도 "사회 불안과 집단 심리를 반영한 생존 장르가 국내외에서 꾸준히 관객을 끌어들이고 있다"고 분석한 바 있습니다(출처: 한국콘텐츠진흥원).

 

《군체》는 결국 좀비 영화의 형식을 빌려, 연결이 진화가 되는 시대에 우리가 어디를 향해 달리고 있는지를 묻는 영화입니다. 그 질문이 불편하게 오래 남는다는 것이, 이 영화가 단순한 장르물을 넘어섰다는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제79회 칸 영화제 공식 초청이라는 수식이 이 영화에는 잘 어울립니다. 전지현, 지창욱, 구교환, 고수, 신현빈, 김신록까지 모두 주연급 연기력을 지닌 배우들이 봉쇄된 수직 공간 안에서 만들어내는 긴장감은 충분히 극장에서 경험할 가치가 있습니다. 코로나 시절을 직접 통과한 분이라면 특히, 영화가 끝난 뒤 자리에서 바로 일어나기가 조금 망설여질 수도 있습니다. 저처럼요.


참고: https://youtu.be/Y6RI7hdc2Jo?si=E3DXRhSnRVkuqxv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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